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1년 지방선거 (문단 편집) == 결과 == 기초의원 선거는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과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지지율이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한 지역 조직력과 야권 분열, 투표율 저조에[* 특히 20대 층에서 투표율이 37%로 비교적 저조하게 나온 원인도 있다. ~~원조 20대 개X끼론~~] 힘입어 예상 외 보수계의 우세로 나타났다. 시·군·자치구의회 260곳 중 190곳에서 보수계가 과반을 차지했고, 기초의원 4,333명 가운데 과반에 조금 못미치는 인원(2,142명)이 민자당원이었고, 신민당은 785명에 그쳤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 까지는 시·군·자치구의회선거에서 정당에서 따로 공천을 하지 않았으나 '''각 정당에 소속된 당원들은 출마가 가능했다'''. 즉, 당적 보유를 한 상태로 출마하는게 가능했다.] 다만 신민당이 지원한 [[무소속]] 후보까지 합치면 902명 정도가 당선되었으니 아주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대했던 서울에서 참패한데다가 전북 일부에서도 민자당에게 의석을 내주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민주당 직접 당선자 33명에 지원 당선자까지 합쳐도 126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치며 역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얻었다. 이후 치러진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자당이 수도권 및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 열세일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비롯한 검찰의 언론플레이와 선거 직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명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 [[밀가루]] 투척 사건이 터지면서 강성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투표 열기가 가라앉게 되고, 역시 기초의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야권 분열에 투표율도 저조하게 나오며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이 당초 열세 지역으로 예측되었던 수도권에서 의석을 싹쓸이하여 868석 가운데 2/3인 564석을 휩쓸어 당초 목표인 550석을 웃돌았다. 지역적으로도 호남과 제주도를 제외한 11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단, 득표율은 40.60%에 그쳤다.) 반면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은 최소목표인 200석(기본 목표는 220석)에 못 미치는 16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수도권에서 민자당에게 1당을 내준데다가 7개 시도의회에서 1석도 얻지 못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민주당(1990년)|민주당]](별칭 [[꼬마민주당]]) 역시 득표율은 선전했지만 비례대표 의석이 없던 특성 때문에 고작 21명의 당선자만 내는데 그치는 참패를 당했으며 진보 민중정당을 표방한 [[민중당(1990년)|민중당]]도 43명의 공천자를 냈지만 강원도 정선에서 당선자 1명을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개표 초반에는 군인표가 무소속과 야당에게 쏠리면서 대구 등 기존 여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지역에서 신민당과 민주당, 민중당, 무소속 후보가 대약진하고 민자당이 참패할 것으로 나왔지만, 투표율이 낮게 나온 탓에(...) 개표가 진행되면서 민자당이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요 지역에서 역전하게 됐고 선거 결과는 민자당의 낙승으로 나타나게 된다. 반면 무소속은 경기, 강원 충남 등 중부권과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115명이 당선되어 돌풍을 일으켰는데, 특히 제주도에서는 민자당을 제쳐 과반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들 무소속 인사 중 상당수는 민자당 공천에서 탈락해 반발 출마한 친여 인사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소속 후보 중 화제가 된 시민연대회의 측은 서울지역 공천자 15명이 전원 낙선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역시 광주와 제주에서 각각 1명의 당선자밖에 못 냈다. [[http://elecinfo.nec.go.kr/neweps/ezpdfwebviewer/ezpdf/customLayout.jsp?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D4F4E323030362F30312F4D4F4E303132303036303638342F4D4F4E303132303036303638345F30303031532E706466|시도의회의원]], [[http://elecinfo.nec.go.kr/neweps/ezpdfwebviewer/ezpdf/customLayout.jsp?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D4F4E323030362F30312F4D4F4E303132303036303638352F4D4F4E303132303036303638355F30303031532E706466#|구시군의회의원]]. 결과적으로 이 지방선거는 [[신민주연합당]]에게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과의 합당 없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결국 1991년 두 당이 통합하여 [[민주당(1991년)|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다음해 [[14대 총선]]의 결과는 민자당의 득표가 비슷한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의 득표는 29.20%로 7%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7%는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2%)이나 [[정주영]]의 [[통일국민당]](17.40%) 등으로 흩어졌다. [[14대 대선]]의 결과도 거의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김영삼-김대중의 득표차가 8.20%였던 상황에서 박찬종이 6.40%나 되는 득표를 올린 것을 감안하면 단일화 실패의 탓을 무시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